자유한 삶을 꿈꾸던 중 불현듯 잠에서 깬 날 깨달았다. 내가 속한 이 삶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현실을 그저 피부로 느끼는 것 뿐 만 아니라, 머리로 이해했기 때문이란 걸. 하루하루, 허덕이면서 내가 속한 시스템의 부속으로서의 역할을 해내는 것은, 이따금 참으로 엉뚱하게도 스스로를 더욱 착실한 부속품으로 나아갈 원동력으로 작용하거나, 혹은 극단적 낭만주의로서 삶의 상처를 부정하도록 이끌기도 하였다.
인간으로서, 신의 소유물로서, 혹은, 시스템의 윤활류로서, 우리는 각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혹은 창출하는지.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이 내가 찾아낸 내 삶의 의미이고, 이를 받아들이까지 꽤 많은 감정의 소모를 겪어야만 했다. 무언가를 정의할 때 우리가 활용하는 개개의 요소들은 물질적이기도, 정신적이기도, 또한 영적이기도 하다. 느낌, 감정, 관찰, 기록, 검증, 직관, 그리고 동물적 감각. 이 지극히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역사적 정의들이 축적되고, 또 그 정의들을 바탕으로 새로은 정의들이 내려진다. 그러나 정작, 우리 자신을 정의내리라 하면, 그제야 황망함, 두려움, 거부감에 휩싸이고, 이는 답을 찾지 못할 질문임을 (또다시)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곤, 애매모호한 태도로 덮어버리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그 질문은 절대로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되돌아 올 것이다. 조금더 명확하고 확신에 찬 대답이 주어질 때까지, 그 질문은 도돌이표 마냥 재생될 것이고, 그 질문의 탐구에 흥미나 열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에게는 이 과정이 본인의 무지에 대한 자각제이자 큰 고통이기에, 퍽이나 괴로운 일일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탐구의 부재 속에서 지식의 탐구는 과연 가치가 있는가? 아니면, 지식의 탐구를 통해 우리는 점차 우리의 정체성의 발현을 조금씩이나마 해내어 가고 있는가? 만일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더 큰 명제라면 왜 정체성의 탐구를 우선하지 않는가? 이는 정체성의 탐구가 지식의 탐구를 필연적으로 요하기 때문인가?
"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씀을 거슬러, 만일 진리를 알고도 자유치 못하다고 느낀다면, 어떤 대안이 주어질 것인가? 느낌이 아닌 직시로, 감정이 아닌 체험으로, 우리는 매순간 진리와 마주하고 있는가?
목적없는 표류라 불러야 겠다. 내 삶은 표류해 왔고, 억압되고 구속되어 일그러졌다. 알 수 없는 듯, 알 수 있도록 이어져 왔다. 매일매일이 예측 가능하면서도, 또한 불투명한 먼 미래의 그림자를 짊어지고, 서서히 어둡게 침잠해왔다. 차츰 가라앉을, 전복되고 있는 배의 선장으로서, 죄책감 보다는 두려움으로, 후회보다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내 안에 밀려오는 바닷물을 눈물 같다고 생각하면서 삼키어냈다.
허나 생명이란 얼마나 질기고도 강한 것이였는지 미처 잊고 있었나 보다. 우아한 죽음, 조용한 최후를 맞이하기에는, 그 문턱에서 맛보는 삶의 숨결이 그리도 달콤하고 간절하여, 도저히 마지막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특별하지 못한 삶을 한탄하다가도, 마지막 순간에서는 모두들 같은 것을 꿈꾸지 않는가. 마지막이라도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지는 것, 그것 이외에는 더 바랄 게 없다는 소박한 소망에 마침내 만족하게 되면서도, 그 이후 돌아서서 다시금 고개를 내미는 욕심 앞에서 참으로 간사한 인간의 생리를 뼈저리게 느끼는 것. 이 모순되면서도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 결국 생명의 고귀한 원리인 것인지, 아니면 오로지 인간의 이기적 속성인 것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이 생경한 모습을 그저 '인간적'이라는 미사여구로 포장해가며, 칼바람에 거칠어진 민낯의 피부도 '강인함'으로 추켜세워온 나의 모습은 과연 은밀한 취미일까, 만국 공통의 버릇일까. 그 과정에서 겪어야만 했던 온갖 구질구질한 관계와 행적은, 결국은 하루하루의 '삶'이란 잔인하고도 어찌할 수 없는 하나의 고귀한 목적을 위한 전리품으로 격상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믿음. 이것이 결국 모두의 삶이 결국엔 하나의 수레바퀴로서, 각자의 목적지를 지닐 수 있는 비밀인 것인지, 역시나 나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